supulrim

겨울이 오고, 떠날 시간이 됐다.

겨울이 오고, 떠날 시간이 됐다. 소년은 자신에게서 가장 두껍고 긴 검은색의 울코트를 입었다. 키 168의 왜소한 체구라 코트가 그를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묘하게도 그에게 잘 어울렸다. 마치 그 코트가 새로운 자신을 숨기려는, 감싸 안으려는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기차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큰 짐은 이미 택배로 부쳤으니, 당장 필요한 것만 챙겨 나서면 될 일이었다. 스킨, 로션, 치약, 칫솔, 샴푸… 소년은 서둘러 필요한 생필품들을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노트북과 책 두 권을 가방에 넣었다. 클래식한 울코트와 커다란 등산용 백팩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10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의 차에 올라탔다. 그제야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짐작을 했을까. 소년의 결심을 알고도 태연히 기다렸을까, 아니면 그저 잠시 경험을 쌓고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을까. 소년은 차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잊은 건 없어? 휴대폰은 챙겼지?” 아버지가 무심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 무심함 뒤에는 묵직한 걱정이 담겨 있는 것을 소년은 느낄 수 있었다.

“여기.” 소년은 짧게 대답했다. 차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차창 밖에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며 소년은 어딘가로부터 멀어지는 중이라는 생각이 스며들었다.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조금씩 나뒹굴었다. 소년은 순간 마치 어린 시절 가을 소풍을 떠날 때의 설렘과 들뜬 마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설렘은 낯선 무거움으로 뒤섞이며 소년의 가슴에 무언가 내려앉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 무게가 자신의 작은 가방에는 담길 수 없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그런 심경을 눈치채지 못한 채,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아꼈다. 곧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아버지는 갓길에 차를 멈추었다. 기차가 출발하기까지 이제 5분 남짓 남아 있었다.

"차 조심하고, 도착하면 연락해." 아버지의 목소리엔 평소엔 잘 들어보지 못한 억양이 담겨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를 보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급히 기차역 쪽으로 달렸다. 그는 이제 뒤돌아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마음속 깊이 쌓인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 것은 가방 안의 짐보다 훨씬 무거운,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마음의 짐이었다. 부모라는 굴레, 오랜 시간 길들여져 온 울타리. 그것이 소년을 붙잡고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떨치고 나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소년은 기차역에 도착해 표를 확인한 후 승강장을 향해 서둘렀다.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그가 가야 할 길이 조금씩 다가오는 듯 했다. 소년은 짧은 순간이지만, 그 안에서 묘한 안도와 동시에 불안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그는 부모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지만, 어쩌면 비로소 스스로의 인생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기차가 곧 출발할 시간이었다. 소년은 서서히 발걸음을 떼며 기차에 올랐다. 창밖에서 점점 멀어지는 고향의 모습은 작아져 갔고, 그 정겨운 풍경은 소년의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소년은 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새로운 삶의 시작을 맞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 두려움 뒤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미한 자유의 감각이 있었다.

소년은 숨을 내쉬며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을 거야."

그 순간,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온 공기는 겨울의 기운을 품고 있었지만, 소년의 내면에는 더 이상 차갑지 않은, 새로운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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